인천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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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리그1 소속의 프로 축구단.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K리그 13번째 구단'''으로 201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중하위권을 오가는 시민구단이다. 최고 성적은 2005년 K리그 준우승 및 2015년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이다.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난 후의 축구 붐에 힘입어, 전국 곳곳에 지어진 월드컵경기장들의 사후 활용과 K리그 저변 확대를 위해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9] 팀 창단을 추진했고, 인천은 할렐루야 유치와 시민구단 창단을 두고 고민하다가 후자로 방침을 바꾸면서 시민구단으로의 창단이 확정되었다.
인천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은 인천시와 시민, 기업이 함께 구단을 출범시킨 ‘연합’의 뜻을 나타내 시민구단의 이미지와 어울려 팀의 명칭으로 선정되었다.#
2. 팀 컬러
열악한 재정 기반과 얇은 선수층, 잦은 선수 이탈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신인들과 산전수전 다 겪은 준척급 선수들이 강한 팀워크와 정신력을 앞세워 분전하는 것이 창단 이후부터 계속된 전통적 팀 컬러. 그 덕에 승강제 도입 이후 단 한 번도 K리그2로 강등된 적이 없다. 심지어 성남 FC가 강등당했던 2016년부터는 유일하게 '''K리그2 경험이 없는 시도민구단'''이 되었다. 그 덕분에 붙은 별명이 '''K리그의 생존왕.''' 시즌 시작 전에는 언제나 하위권으로 분류되지만 심심찮게 상위 스플릿을 위협하고 FA컵 결승에 오를 정도로 K리그 내에서는 복병으로 손꼽힌다.
팬들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점은 성장세가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선수가 매년 몇명 단위로 홀라당 팔려나가면서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신 인천은 유소년, 신인 발굴과 잊혀진 선수 재활용에 일가견이 있는 팀이라 매년 활약해 주는 선수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팀을 벼랑 끝에서 끌어 올린다.
다만 이와 같은 일들이 매년 반복되기 때문에 시즌 시작 직전까지도 스쿼드가 어느 수준인지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야 문제점이 여기저기 터져나오면 여름 이적시장에서 급히 보강한다. 때문에 인천은 늘 여름 이적시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팀이 되며, 그래서 여름 이적 시장이 종료되면 이 팀의 '''특수 능력이 발동'''된다. 여름까지는 꽤 차이나는 꼴찌, 혹은 꼴찌까지는 아니더라도 잔류와는 거리가 있는 강등권에 랭크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인천 팬들 또한 '''이번 시즌만큼은 힘들겠다'''며 체념하게 되는데, 희한하게 이때부터 '''각성하더니 귀신같이 승점을 쓸어 담는다.'''
시즌 중에는 시전 전부터 예견되었거나, 시즌 도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를 맞아 최하위권에 랭크되는 팀이 늘 서너 팀 정도 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의 팀이 끝끝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반면에, 인천은 '''여름부터 늦게나마 맞아가는 선수들의 조직력, 구성원들의 위기의식 각성, 팀의 상황을 각오하고 들어온 새로운 멤버들'''[10] 이라는 세박자가 맞아 떨어져서 어떻게든 나머지 팀들을 끌어내리고 기어이 1부 리그 잔류에 성공해낸다.
특히 팀이 강등 위기에 처하게 되면 어디 가 있었는지 안 보였던 팬들이 홈, 원정을 가리지 않고 경기장으로 대거 집결,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 올린다.[11][12] 선수들 또한 인터뷰를 통해서 많은 관중이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 피드백했다.
끝내는 웃고 있으니 해피엔딩이지만 상술한 한계들만큼은 극복하지 못해서 늘 '''잔류하는 것'''에 웃을 수 밖에 없는 조금은 슬픈 속사정을 가지고 있다.[13]
여튼 이러한 덕분에 승강제 도입 이후 승강플레이오프에도 떨어진 적이 없어서 '''단 한 번의 강등경험이 없는 유일한 시도민구단'''이 되었고 어느 매체에서든 팀이 소개될 때 늘 '''생존왕'''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상술한 대로 8~9월부터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 가을 인천이란 별명 또한 가지고 있다.[14]
다만 2000년대부터 인천 유나이티드가 매년 중위권 이상에 플레이오프에도 심심치 않게 진출하고 FA컵 4강 이상으로 ACL 진출권도 노린 전력을 지녔던 시절부터 응원한 팀 사정에 정통한 올드팬들의 경우, 구단과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존왕 이미지에 굉장히 비판적이다. 중위권 이상을 노려야 할 전력까지 올라가 있음에도 단순히 '''‘우리는 생존왕이니까 막판에 생존만 하면 돼‘라는 구단의 자화자찬으로 퉁치려는 마인드를 팬들에 대한 기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살아남은 것에는 당연히 박수들은 치지만, 야구로 따지면 비밀번호 찍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고, 전반기 망쳐서 하위스플릿 떨어져서 겨우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매년 단순히 생존했다고 환호해야 하나?" 하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광역시를 끼고 있는 인천이 시민구단 중에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던 편이라 더더욱. 2019 시즌에는 이러한 하위권 전전에 함께 하위권에 있던 경남, 제주와 묶여 강등권 '''경제인 트리오'''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이전 문단에서 전술했듯 여타 시민구단들은 이미 K리그2로 강등된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팬들도 선수들의 막판 분전 및 생존본능에는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구단의 행정 및 눈가리고 아웅식 생존왕 이미지 띄우기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 2018년 12월에 인천의 잔류를 이끌어냈던 욘 안데르센 감독 또한 이러한 구단의 생존왕 이미지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내가 와서 겪어 보니 인천은 그렇게 1부 리그에 생존하는 데 만족해선 안 되는 팀이다. 훌륭한 도시, 훌륭한 팬, 훌륭한 경기장과 인프라가 있다." 라고 하며, 구단이 좀 더 좋은 행정을 해주는 조직이 되기를 희망했다.
3. 엠블럼
2003년 12월 23일부터 27일까지 4개 시안을 놓고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총 5,002명의 응모자 가운데 2,296명(46%)으로부터 1순위로 지정받음에 따라 구단 공식 엠블렘으로 선정됐다.
인천 유나이티드 엠블렘은 당시 K리그 다른 구단에서 사용하지 않은 타원형의 모양을 활용하여 창단 주체인 인천시, 시민, 기업이 원만하게 화합하는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엠블렘의 문양은 인천을 상징하는 닻, 바른길로 이끄는 방향키, 비상하는 날개의 형상을 조합하여 인천 구단이 한국프로축구의 새로운 리더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았다. 또 노란색의 문양과 테두리에 해양도시인 인천을 나타내는 블루와 블랙의 줄무늬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인천구단의 역동성과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축구 팬들 사이에선 멋진 엠블렘으로 손꼽히는 디자인이다.
3.1. 창단 10주년 기념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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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시즌 구단 창단 10주년을 맞이하여 구단 정체성 확립과 함께 2013 시즌 K리그 클래식 상위 스플릿 진출 및 시·도민 구단 최초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달성[15][16] 하려는 의미를 담은 창단 10주년 기념 엠블럼을 선보였다.
기존 항구 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닻 모양 형태의 형상을 기준으로 한 기본 엠블럼에다가 홈 경기장인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단순형상화 하였고 비상의 의미를 담은 날개 형태를 형상화하여 2013년 시즌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4. 역대 시즌
5. 역대 감독
6. 역대 주장
7. 유니폼
8. 캐치프레이즈
9. 영구결번
시민구단으로 출범한 취지를 살려 12번째 선수인 서포터즈와 팬들을 위해 창단과 함께 12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25]
10. 주요 기록
11. 역대 스쿼드
11.1. 등번호
12. 유소년 시스템
13.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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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의 공식 마스코트는 '''유티'''다.
인천광역시의 상징새인 두루미를 의인화한 형상으로 프로축구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의지와 인천광역시, 인천시민, 인천 연고 기업이 화합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친근한 이미지로 상징화하였다. 붉은 머리털은 축구에 대한 강한 열정을, 큰 날개는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와 페어플레이의 스포츠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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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사항으로는 대전 시티즌 팬에게 '''폭행(!!!)'''당한 전력이 있다. 일명 '''두루치기''' 사건 (...) 자세한 내용은 인천 유나이티드 FC/2012년#s-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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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스코트를 리뉴얼하면서 모습이 바뀌고 서브 마스코트로 물범과 등대를 캐릭터화한 버미, 애이니, 꼬미, 등대리가 추가됐다.
14. 시설
14.1. 경기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창단 첫 해부터 홈 경기장으로 쓰던 인천문학경기장을 떠나 2012년부터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홈 경기장으로 쓰고 있다.[26]
설계 때부터 오직 인천 유나이티드만을 위해 만들어진 경기장으로 지어졌다. 관중석 의자 색깔도 인천의 유니폼 색인 파란색을 기본으로 하고, 검정색과 노란색으로 수놓았다. 동쪽 관중석에는 의자에 구단 이름을 영문으로 새겨 넣어 인천 팬들의 자부심을 높였다.
그라운드 터치라인에서 관중석까지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여 경기를 생동감있고 역동적으로 볼 수 있다. 골을 넣은 선수가 관중석으로 달려가 팬들과 껴안는 골 세레모니에 최적화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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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5일 극적인 3-2 역전 결승골#을 성공시킨 빠울로의 골 세레모니.
관중석과 그라운드가 가깝다 보니 그라운드를 뛰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선수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다. 국내의 다른 어떤 구장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관중과의 거리를 좁혔고, 2019년에 완공된 DGB대구은행파크나 여기에 비벼볼만 하다.
지나치게 큰 다른 K리그 팀들의 월드컵경기장들과는 달리 약 2만 석의 적절한 규모로 지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 문서 참조.
14.2. 클럽하우스
15. 라이벌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팀답게, 주로 수도권이나 경기도권 팀들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
15.1. 경인 더비 - FC 서울
K리그 팀들 중 FC 서울과 사이가 좋은 팀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인천과 서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포터즈들의 호전성도 강하기 때문인지 미묘한 라이벌 감정과 해마다 끊이질 않는 양 측 서포터즈들간의 충돌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다. 자금이나 규모면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두 팀이지만 인천의 맹렬한 라이벌 의식 덕분에 상대전적이 그렇게까지 밀리지는 않는 편.
'''그래서 서포터들 중에서는 슈퍼매치를 언론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더비라고 폄하하고, 경인 더비야말로 진짜 더비 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27]
인천이 처음 리그에 참여한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인천의 전적이 약간 앞서있었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인천이 이기질 못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는 중. 2013부터는 서울이 강한 우세에 놓였으나, 2018년부터 인천에 약소한 우세가 이어지고 있다.
인천에게 있어서는 서울이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봐도 될 것이며, 서울에게는 수원과의 슈퍼매치 다음가는 라이벌 더비로 자리잡았다. 언론과 K리그 팬들은 경인 더비란 명칭을 사용하나 인천측은 2016년 7월 17일부터 이 더비를 인천광역시의 인(仁)자와 서울특별시의 경(京)자를 따서 인경전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 FA컵 결승에서 인천이 서울에게 패함에 따라 이들의 적대감은 다음 시즌에도, 그 후로도 계속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사이 안좋은 것과 별개로 구단간의 선수 이동은 활발한 편이다. 굴지의 대기업 산하 기업구단과 열악한 시민구단 사이의 거래이지만 그 손익이 일방적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는 점도 이채롭다.
15.2. 수인선 더비 - 수원 삼성 블루윙즈
1호선/수인선 지하철 사이의 더비[28] 로 지역 내에서는 수인선 더비라 부른다. 반면 수원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약하다. 차범근 시절까진 수원 2중대였고 윤성효 감독 부임 이후엔 그나마 좀 할만해졌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상대.
통산 5승 14무 26패라는 절대적인 상대 전적 열세를 당하고 있다.
2012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의 역사적인 홈 첫경기에서도 수원 삼성은 자비없이 2:0으로 무참히 홈 첫경기를 패배로 장식해 주었다. 하필 2골 다 인천 출신 라돈치치가 꽂아 넣었다. 반대로 2013년에는 25R에서 인천이 수원 삼성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역사적인 첫 상위 스플릿 입성을 결정짓는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기나긴 수원전 무승이 이어져오다가 2019년 K 리그 1 25 라운드 (8월10일) 에서 인천은 수원 빅버드에서 열린 원정경기에서 후반 6분 김호남이 오른 측면에서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문을 열어 1-0으로 이겼다. 인천은 수원 삼성을 상대로 6년 만이자 원정에서는 무려 10년 만에 승리를 맛봤다.
2019년 10월 27일 파이널 라운드 B에서도 인천 유나이티드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전반 25분 타카트에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경기 종료 직전 명준재의 극적인 동점골과 함께 극적인 무승부와 함께 잔류본능을 이어가게 된다.
2020년에는 2014년 이후 6년만에 숭의아레나에서 승리하게 된다.
15.3. 032[29] 더비 - 부천 FC 1995
지리적으로 인천과 부천은 서울보다도 훨씬 가까운 이웃 도시였고, 1980년대 한때 유공 코끼리가 인천·경기지역을 광역 연고로 하던 시절도 있었다보니[30]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하기 전엔 부천 SK를 응원하는 인천시민들도 많았다. 그리고 2003년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하고 이 두 팀은 032 더비라 하여 많은 명경기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부천 SK는 이후 제주로 연고지를 이전해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고, 두 팀간의 대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싶었지만 부천 FC 1995가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032 더비가 다시 부활하였다.
재밌는건 前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김봉길의 아들 김신철이 부천에서 뛰고 있다는 것. 이래저래 다시 만난다면 재밌는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팀 성적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4년 봉길매직은 끝났고, 김신철 선수의 부담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5년 대한축구협회 FA컵 32강전에서 만나게 되어 10년만에 032 더비가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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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의 더비 경기에서 2대0으로 완승하자 인천 서포터즈가 선보인 배너. '''같은 032 다른 CLASS'''. 부천이 2부 리그인 K리그2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위트 있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4. 전북 현대 모터스?
이상하리만큼 전북을 상대로 강하다. 역대 전적도 13승 16무 17패로 백중세다. 과거 전북이 동네북으로 취급당하던 2000년대 중반에 전북을 상대로 승점을 많이 쌓은 것도 있지만, 리그 최강으로 군림한 2010년대 이후에도 인천은 때만 되면 전북의 발목을 잡으며 승점 3점을 획득할 정도. 유난히 인천만 만나면 부진한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전북의 수장인 최강희 감독도 인천과의 승부는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 반대로 인천 선수들은 전북만 만나면 오히려 힘이 난다고 하니 과거 수원과 대전의 천적관계가 생각날 정도.
한편 2013년에 정혁-정인환-이규로가 세트로 전북으로 이적했고, 2014년에는 김남일과 한교원이, 2015년에는 문상윤까지 전북에 합류해서 이 면에서도 인천은 전북에 경쟁 심리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이적한 선수들 모두가 하나같이 인천에서는 핵심으로 활약한 선수들인 반면 한교원을 제외하면 전북에서의 활용도가 애매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인천 선수의 전북 이적은 일단은 사그라들었고 김인성, 박세직, 송제헌 등 반대로 전북에서 인천으로 합류한 선수들도 있어서 이적 면에서 전북의 2중대라는 놀림도 옛말이 됐다. 2019년 초에는 문선민과 이재성의 트레이드로 두 팀 간의 대형 선수 거래가 간만에 일어났는데, 문선민은 2018년 인천 소속으로 전북을 만날 때마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고전시킨 주인공인만큼 묘한 이적이다.
16. 사건사고
17. 그 외
- K리그의 대표적인 잔류왕 기믹 구단이다. 수많은 강등 위기에도 시즌 막바지가 되면 갑자기 승점을 쓸어담으며 최종전에 가서야 비로소 잔류를 결정짓는 기묘한 팀인 탓에 시즌 후반 우승경쟁과 더불어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승강전이 처음 도입된 2012년부터 강등권에서 허덕였으며, 2014년에도 첫 10경기 무승의 암울한 시작에도 10위로 잔류에 턱걸이했다. 이후 2016년부터는 매년 강등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4시즌 연속 최종전까지 갔으며 2020년 스플릿에서도 최종전까지 가 결국 서울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잔류에 성공했다. 특이한 것은 잔류왕 기믹에도 불구하고 승강플레이오프를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라는 점이다. 사실 11위로 시즌을 마무리해도 승격에 도전하는 팀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인천은 그조차도 싫은지 극적인 반등을 통해 꼭 10위 안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있다. 특히 2016년부터 5시즌 연속 최종 라운드까지 가서야 잔류가 결정되고 있는데, 꼭 하위 스플릿에서는 깡패 같은 모습을 보이며 자동 잔류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인다.
- 시민구단의 한계상 열악한 재정 탓에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룬 선수들을 다른 돈 많은 구단들에게 팔아 이적료로 수입을 남기는 셀링클럽이다. 그렇게 선수를 팔고도 하위권을 기어다며 적자에 쪼들리는 시민구단들이 비일비재하고 인천도 적자로 인해 재정과 성적에 위기가 왔었다. 인천에서 매각한 선수들을 전부 모아놓으면 리그 올스타에 준할 정도로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 이정수, 최태욱, 이근호[31] , 최효진, 김치우, 라돈치치, 데얀, 유병수, 정인환, 이석현, 문상윤, 유현 등이 있다. 요즘에는 전북 현대의 선수 셔틀노릇을 하고 있다. 2012 시즌 종료 후엔 사실상 수비진을 뜯어내다시피해서 정인환, 정혁, 이규로를 내주더니 2013 시즌 종료후엔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과 공격수 한교원을 전북으로 보냈다. 그리고 2015 시즌을 앞두고 문상윤까지 전북으로 보냈다. 때문에 구단내 선수들이 특출나게 눈에 띄기 시작하면 팬들은 기쁨 반, 다른 팀에게 뺏길까 노심초사하는 걱정 반의 감정을 느낀다. 다행스럽게도 2015 시즌이 끝난 후 케빈, 이윤표, 박대한, 요니치, 조수혁, 진성욱 등 기존의 주전급 선수들 대다수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전력 유출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전북으로 일방적으로 선수를 보내는 흐름에서 탈피했고, 이런 거래 경력때문인지 전북 측에서 인천으로 선수를 보내는 경우도 잦아졌다. 2019 시즌 여름에는 명준재, 장윤호를 임대로 보내주기도 했고, 두 선수는 인천의 잔류에 공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2015 시즌에는 인천 축구 경기장 전광판에 수시로 선수들의 외모 별점이 떴다. 경기장 아나운서가 "인천의 소닉붐 김인성!" 이라는 식으로 별명을 부르면 99%의 확률로 전광판에 외모 별점이 나타나는데, 별점이 높으면 기분이 좋을 수 있겠지만 별점이 낮으면 홈-원정 관중 가릴 것 없이 소소한 비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런 연유로 인천의 김도혁 선수는 자신의 얼굴에 매겨진 별점 반 개 (...)에 애교 섞인 항의글을 페이스북 댓글에 올려 작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
- 2010년까지 메인 스폰서가 GM대우였고, 초대 단장이자 현 대표이사인 안종복, 전임 감독인 장외룡을 비롯하여, 2005년 원년멤버 선수로 임중용과 김학철 등 부산 대우 출신 선수를 수혈한 상태로 창단하는등, 경영진과 선수단에 과거 대우 로얄즈와 관련된 인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인유를 로얄즈의 후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양 구단은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 옳다. 대우 로얄즈를 계승하는 팀은 現 부산 아이파크이다.
- 장외룡 감독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 호나우두나 앙리가 나이 들어 은퇴할 때쯤 되면 데려오겠다고 호언장담한 적도 있다. 그리고 팬들은 이를 그냥 지방구단 흥보 차원에서 한 말로 이해했고, 실제로 둘 다 은퇴했지만 안 왔다 (...)
- 일본어 위키에서는 인유가 '유나이티드'라는 명칭을 유럽에서의 쓰임새와 달리 단순히 이념적으로 사용한 거라고 서술했지만, 사실은 유럽에서도 여러 구단이 통합된 게 아니더라도 '유나이티드'는 뜻이 좋아서(...) 엄청나게 자주 쓰인다.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을 쓰면서 여러 구단이 통합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구단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다. 맨유는 철도 회사의 실업 팀에서 프로 팀으로 전환한 경우이며 통합된 구단은 없다.
- 18시즌 잔류의 일등공신인 남준재. 그러나 인천 구단은 살아있는 레전드, 해당시즌 주장이었던 그를 19시즌 도중 제주로 이적시킨다. 제주의 김호남과 맞트레이드를 성사시킨 것인데 이를 두고 남준재가 먼저 제주에 오퍼를 던졌네 어떻네 구단은 애둘러 포장을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제주쪽에서 남준재 측으로 오퍼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아무튼 석연치 않게 그를 이적시킨후 인천은 레전드급 선수들에 대한 예우에 대해 큰 비난을 받는다. 예우를 해주기는 커녕 시즌중 폐기처리해버리는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여 각 언론과 인천의 일반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인천의 서포터즈인 파랑검정은 제주와 인천 경기후 인천팬들에게 인사하러 오는 남준재를 향해 "남패준재"라는 걸게를 걸은 행태에 대해 많은 K리그 팬들 그리고 인천의 비서포터즈 일반팬들에게 대차게 까인다. 인천의 레전드급 베테랑을 폐기처분하는 행태는 남준재뿐이 아니라 이윤표, 최종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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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인천광역시의 남동구를 연고로 하는 K4리그 참가 세미프로 축구단인 FC 남동과 상생협약을 맺었다. # 협약을 맺은지 1년 후인 2021년에는 남동에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유동규를 인천 유나이티드가 영입하기도 했다.
18. 팬덤
18.1. 규모와 인기
2004년 첫 리그 참가 후 5년 정도까지 인천은 평균관중 16,000명대를 자랑하면서 인기를 몰고다니는 구단이었지만, 2000년대 후반에 들어 스폰의 감소와 구단 성적 저하 등 여러 요인으로 팬층이 단계적으로 감소하며 비인기구단 소리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32] 하지만 2015시즌 FA컵 준우승과 2016시즌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의 극적인 잔류성공, 경기 종료 후에 펼쳐진 마치 유럽과도 같은 관중난입의 대광경을 기점으로 팬이 점차 늘더니,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하위권은 하위권인데 어떻게 어떻게 잔류에는 성공하며 상위권팀 상대로 고춧가루 뿌리기도 잘하는 "잔류왕"이라는 기믹이 가미되었고, 팬층이 다시 회복세에 돌아서기 시작했다.
순위만 놓고 보면 1부리그에서 그리 별볼일 없어 보이는 하위권 팀일지도 모르나, 매년 펼쳐지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구단, 선수, 팬의 세박자가 조화된 투혼의 시나리오가 수년째 계속되자 이것이 하나의 팀 컬러와 같은 것으로 자리잡았고,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구단의 인기 또한 상승하며 현재는 당당히 K리그의 인기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레벨의 팬층을 갖추고 있다.
18.2. 응원 및 서포터즈
인천 유나이티드의 과거 공식 서포터즈는 미추홀 보이즈(MEETYOUHALL BOYS)였으며(2014년 9월부로 해체), 규모는 작지만 적극적인 행동력과 특유의 호전성으로 다른 대형 구단들의 대형 서포터즈들과도 전혀 밀리지 않는 악명과 사건 기록을 자랑했다. 수원의 프렌테 트리콜로, 서울의 수호신 소속 소모임인 타나토스와 함께 클래식에선 제일 악명 높았던 서포터다. 미추홀 보이즈가 해산된 후에는 인천의 각 서포터 소모임이 파랑검정이라는 이름의 현장 연합 팀을 구성하여 응원을 진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파랑검정 문서 참조.
대부분의 K리그 구단들이 그렇듯 구단 차원에서의 응원단은 두고 있지 않다. 대신 '''푸른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2명의 장내 아나운서인 안영민과 김민정이 활동하고 있으며, 경기 전 응원 연습이나 하프타임 행사 진행, 인천의 선수가 골을 넣었거나 호수비를 보여줬을 경우의 선수 응원 콜 선창, 경기 종료 후 승무패 알림 등을 맡는다. 소개 영상 이들 중 김민정은 결혼을 계기로 2018년을 마지막으로 퇴직.
18.3. 온라인 팬커뮤니티 - 인천네이션
18.4. 네임드 팬
- 손수호 - CBS 김현정의 뉴스쇼의 유튜브 부록방송 '댓꿀쇼'에서 간간히 인천과 관련한 얘기를 하며 인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 팟캐스트 히든풋볼에서 히든인천 코너를 만들었다. 초기 녹화는 송도사는 이회장, 심재국과 함께 인천 경기 및 인천 구단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전했고, 2020시즌이 끝난 이후엔 인천 구단 관계자들도 녹화에 참여시키며 열정을 보이고 있다.
- 리듬파워
19. 2021 시즌 스쿼드
19.1. 코칭스태프 명단
19.2. 선수단
20. 역대 주요 선수
20.1. 선수들이 뽑은 10주년 기념 베스트 11
- 선정한 선수들 본인은 본인을 무조건 엔트리에 포함.
- 뽑은 선수들과 직접 같이 뛰어본 선수로만 선정.
20.2. 레전드
20.3. 주요 선수
- 임중용 (2004~2011): 2018년 12월 기준 인천 유나이티드 역대 최다 출전을 기록한 인천의 상징. 인천의 창단멤버였고 최장기간 주장을 역임한 선수이며, 2005년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수비수였다. '라돈 투게더'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인천의 등번호 20번이 의미있는 번호가 된 이유도 20번이 임중용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에도 인천에 코치가 되어 돌아오는 등 인천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선수.
- 전재호 (2004~2011): 임중용과 함께 인천의 전설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로, 출장 횟수도 역대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한다. 좌측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2010년에 주장을 역임하기도 한 선수. 강원 FC에서 2013년에 은퇴한 이후 2015년부터 인천대건고의 코치가 되어 인천에 돌아왔고, 2017년에는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 김이섭 (2004~2010): 인천 역대 골키퍼 중 최고로 인정받는 전설. 창단멤버였고 앞의 두 선수와 함께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숟한 경쟁을 인천에서 겪었으나 대부분 최후의 승자는 김이섭이었다.
- 노종건 (2004~2010): 아쉽게도 원클럽맨이 되지는 못했으나, 묵묵히 제 몫을 다한 인천 중원의 살림꾼으로 평가받았다. 2010년까지만 해도 창단 멤버 + 원클럽맨이 가능해 보였지만, 폼이 급락하여 아쉽게 팀을 떠나고 이후 공익 근무를 하다가 은퇴했다.
- 김학철 (2004~2008) : 초창기 인천 수비를 임중용과 함께 이끈 베테랑. 임중용처럼 대구 FC 창단 멤버 - 인천 창단 멤버를 연속으로 거친 선수였다.
- 방승환 (2004~2008): 초창기 인천 공격진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판 항의 사건으로 8개월 간 그라운드를 떠나있기도 했으나, 돌아와서 복귀골을 신고한 뒤 서포터즈에게 절을 하기도 했다.
- 제난 라돈치치 (2004~2008): 인천 외국인 선수 중 최다 출장, 최다 득점 기록자. K리그의 다른 팀들도 거쳤지만, 인천에서는 특히 그 의미가 깊은 선수다.
- 최태욱 (2004): 인천의 창단 멤버 중에서도 최고의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선수. 2004 시즌의 에이스였지만, 한 해만에 결국 팀을 떠난다.
- 이정수 (2004~2005): 주전 경쟁에서 낙오된 이정수는 인천 이적 이후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었고, 부상에 시달리던 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활약으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적.
- 김현수 (2004): 인천의 첫 주장. 경력도 화려한 선수였고, 혼란스러운 창단 시즌을 그래도 지탱해준 선수.
- 미오드라그 안젤코비치 (2004): 인천의 1호골을 기록한 선수. 그러나 반 시즌만에 팀을 떠나 그 활약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 라디보예 마니치 (2004~2005): 안젤코비치가 나간 자리에 들어왔고, 2004 시즌 후반기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임팩트를 남겼다.
- 박재현 (2005~2009): 2005 시즌에 입단하여 2007 시즌에 기량이 만개했다. 다만 적절한 스쿼드 로테이션 플레이어로는 평가받았으나, 핵심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 최효진 (2005~2006): 2005, 2006 시즌 우측면을 든든하게 담당한 선수. 당시에는 쓰리백에서 전재호와 양 측면 미드필더를 담당했다.
- 서동원 (2005~2006): 트레이드로 인천에 합류하여, 과거 국대 출신답게 중원을 안정화시켜 준우승에 공헌한 선수.
- 야스민 아기치 (2005~2006): 2005 시즌 서동원, 노종건과 중원을 형성하여 대단한 기량을 보여준 핵심 미드필더.
- 셀미르 (2005~2006): 저니맨답게 인천에서 뛴 기간은 짧았으나, 그 와중에도 중요한 공격 포인트를 많이 기록하며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난 공격수다.
- 장경진 (2005~2011): 2005 시즌부터 인천에 합류하여, 긴 기간 수비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김학철, 임중용 등에 비해 확고한 주전으로 올라간 시기는 짧았다.
- 드라간 (2006~2009): 이름값이 굉장히 높아서 올 때부터 기대를 모았고, 오자마자 코너킥 직접 득점에 최단시간 골 등 화려한 기록을 쓴 미드필더였다. 인천에서 3년 반동안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은퇴했다.
- 김영빈 (2006~2011): 인천 수비진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고 김학철의 노쇠화 이후로 주전으로 승격되었다.
- 김상록 (2007~2009): 2007 시즌을 이끈 에이스. 방승환, 데얀과 함께 닥공의 주축이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감독 교체와 전술 교체로 인해 폼이 급락했다.
- 데얀 (2007): 2007 시즌 한 해만을 뛰었으나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고, 인천을 떠난 이후로는 말 안해도 모두가 알 자타공인 K리그의 레전드에 등극했다.
- 안재준 (2008~2010, 2013~2016): 인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임중용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입단 직후부터 잦은 기회를 받았고 또 그를 잘 살렸다. 허정무 부임 이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지만, 2013 시즌을 앞두고 돌아와서 다시 그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군 입대 이후 노쇠화를 보여주면서 아쉽게 팀을 또 떠났다.
- 유병수 (2009~2011): 인천 구단 역사 상 최다득점자. 2년 반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뛰었음에도 엄청난 스탯을 기록했다. 동시에 인천 역사 상 최초의 리그 득점왕 배출.
- 정혁 (2009~2012): 부상은 좀 잦았지만, 중원에서 항상 제 몫을 다했다는 평을 들었다. 2013 시즌 시작 전에 정혁 + 정인환 + 이규로 세트 이적에 묶여서 전북 현대 모터스로 떠났다.
- 이윤표 (2011~2019): 인천의 차기 레전드로, 별명은 미추홀 파이터. 초창기에는 그리 신뢰를 받지 못했으나, 꾸준히 활약하며 자신의 이름을 팬들에게 점점 각인시켰고, 어느새 인천의 최고참의 자리에 올랐다. 임중용의 후계자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자신만의 등번호 16번에 새 의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레전드.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지만 인천에서 10년 가까이 뛰며 232경기를 소화했다. 허나 은퇴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며 현재는 레전드라는 칭호와 거리가 멀어진 상태.[34]
- 티무르 카파제 (2011): 인천의 아시아 쿼터로는 첫 성공작이었고, 2011 시즌 인천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 한교원 (2011~2013): 인천 시절에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긴 윙 포워드. 특히 2012 시즌 후반기부터 2013 시즌까지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전북 이적 후 인천과의 경기에서 한퀴아오 사건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팬들에게 아직까지는 좋은 기억에 가깝다.
- 권정혁 (2011~2014): 윤기원 선수의 죽음 이후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대체자로 영입되었고, 유현에게는 계속 밀리는 모습이었으나 본인이 주전이던 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골킥으로 득점을 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 빠울로 (2012): 빗속의 경인 더비에서 넣은 단 1개의 골로 전설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해당 골 이후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이후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2018년 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김남일 (2012~2013): 인천 소속으로 국가대표에 뽑힌 몇 안 되는 선수.[35] 특히 2013 시즌에는 축구 도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기량을 펼쳤다.
- 이보 (2012, 2014):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잠시나마 인천 역대 최다 어시스트 기록을 전재호와 함께 보유했지만, 케빈이 이를 순식간에 앞질렀다.
- 박태민 (2012~2014): 3년간 측면 수비를 꾸준히 책임진 선수. 2014년에는 주장도 역임했다. 그 뒤 남준재와 같이 성남 이적.
- 문상윤 (2012~2014): 인천 유스 출신 첫 번째 성공작. 측면과 중앙을 오가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 구본상 (2012~2014): 데뷔전에서 퇴장을 당하는 불행도 있었지만, 중원에서 김남일의 파트너로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 최종환 (2012~2018) : 굉장한 킥력을 지닌 측면 플레이어로 측면 미드필더 자리부터 시작해서 풀백까지 다양한 포지션에서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6 시즌부터는 팀의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 유현 (2012~2015): 사실상 유현의 전성기가 인천 시절으로, 그의 존재만으로도 수비가 든든해진다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다. 인천을 떠난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아쉬운 점.
- 진성욱 (2012~2016): 인천 유스 출신의 두 번째 성공작이고, 4경기 연속 골 등 임팩트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인천 소속으로 U-23 대표에도 뽑혔었다.
- 이천수 (2013~2015): 그 이름값으로 인해 올 때부터 많은 주목을, 또 우려를 받았다. 중간에 논란도 일으켰지만, 위기에 빠진 팀과의 재계약을 선택하고 마지막 해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경기장에서 보여주며 마무리만큼은 멋있게 하였다. 이후 인천의 전력강화실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연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직함은 전력강화실장이나 인천팬들 사이에서는 전력약화실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 이석현 (2013~2014): 2013 시즌에 보여준 모습만큼은 팀의 에이스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보의 존재로 인해서 포지션이 애매해지며 아쉽게 인천 생활을 마무리.
- 김대중 (2014~ ): 초창기에는 불안하다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었지만, 수비진 로테이션 멤버로는 확실한 능력을 입증했고 거기에 2017 시즌에는 공격수로도 재능이 있음을 입증했다.
- 김도혁 (2014~ ): 젊은 나이에 부주장, 주장을 모두 경험한 차기 레전드 1순위. 구단에 대한 애정을 항상 드러내온 바 있고, 팬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깊게 남겼다. 2017 시즌에는 최종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잔류에 공헌했다. 2017년이 끝나고 아산 무궁화에 입대했다.
- 김용환 (2014~2018): 측면이라면 좌측, 우측, 공격, 수비 모두 가리지 않고 소화하는 인천의 만능 자원. 데뷔 초에는 힘든 시기도 있었으나 2016 시즌부터 측면의 확고한 주전으로 올라섰다. 유스 출신인 만큼 특히 주목받는 선수.
- 이태희 (2014~): 현재 인천 유스 출신 선수 중에서 팀에 제일 오래 있었으며, 경기를 많이 뛴 선수는 아니지만 원 클럽 플레이어에 도전하고 있는 선수. 2020년 기준 7시즌동안 팀에 있었으며 현재 인천 소속 선수중에서도 팀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다. 인천 유스 중에서는 최초로 골키퍼로써 프로 직행에 성공했다.
- 권완규 (2015~2016): 트레이드로 인천에 입성하여 초기에는 실책도 간혹 범했지만, 팀 수비의 일원으로 최소 실점을 이끌기도 하고 2016 시즌에는 해결사의 면모까지 보여주며 팬들의 인정을 받았다.
- 박세직 (2015~2017): 중원에서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하며 공수 밸런스를 잘 맞췄고, 왼발 킥이 좋아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맹활약했다. 2017년 여름 아산 무궁화에 입대했다.
- 박대한 (2015~2016, 2020): 입단 테스트를 거쳐 간신히 들어온 만큼 절박한 플레이를 보였고, 2015 시즌 베스트 11 후보에도 들어갔었다. 권완규와 함께 측면에서 믿음직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 김원식 (2015): 임대로 짧은 기간 함께 했음에도 인천 팬들의 큰 애정을 받는 선수. 실제로 2015 시즌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 김인성 (2015): 원래부터 빠른 발로 유명했고, 그 발을 살려 한 해동안 공격의 축으로 자리잡았다. 몸값 문제로 아쉽게도 1년만에 보낸 선수.
- 케빈 오리스 (2015~2016): 단 2년의 활약으로 구단 역대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 그 2년동안 인천의 공격은 케빈으로 시작해 케빈으로 끝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특히 2016 시즌에는 시즌 전체로 보면 10-10을 한 시즌에 달성하는 면모를 보여줬다.
- 마테이 요니치 (2015~2016): 2년 연속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된 인천 역사 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실력이 정말 탁월한 선수였고, 수비진의 중심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 송시우 (2016~ ): 입단 초기부터 조커로 극적인 득점을 기록하며 시우 타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2017 시즌에는 팀 내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 한석종 (2017~2018): 데뷔전에서 오심으로 퇴장당하는 불운도 있었지만, 어느새 인천 중원의 상징이 되어 상대 중원을 틀어막고 공수 양면에 큰 기여를 했다.
- 김진야 (2017~2019): 유스 출신으로 새로이 주목받는 스타. 아시안게임을 거치면서 인천 내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지닌 선수로 성장했다.
- 고르단 부노자 (2017~2020): 초창기에는 불안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2018 시즌 동안 인천 수비의 핵심이 된 선수. 구단에서 불합리한 대우도 받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증명함으로써 구단과 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또한 리더십도 아주 출중한 선수라 팀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는 선수. 다만 기량에 대해서는 시선이 꽤나 엇갈리는 측면도 있다.
- 문선민 (2017~2018): 인천 역사상 인천 소속으로 첫 대한민국팀 월드컵 참가 및 출전 명단에 포함된 선수. 스웨덴 리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인천에 합류했으며, 특유의 저돌적 플레이로 눈길을 끌었다. 결국 2018 시즌의 맹활약을 통해 국가대표에 데뷔했고, 데뷔전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 정산 (2017~): 2018년 8월부터 인천의 주전 골키퍼로 나오는 중이며 인천에서 프로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골키퍼이다.
- 스테판 무고샤 (2018~ ): 제2의 데얀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을 이어가는 특급 공격수.
- 엘리아스 아길라르 (2018, 2020~): 과거 이보가 보여주었던 퀄리티를 보여준 코스타리카 출신 미드필더. 인천에서 최초로 MF 부문으로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된 선수이기도 하다.
21. 같이보기
[1] 국내의 모든 시민구단이 다 그렇듯 시민구단의 구단주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이 맡는다.[2] 인천광역시 제1시금고[3] 인천국제공항공사 운영 공항[4] 2005년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단을 배경으로 제작됐던 영화 비상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한 모습이다. 현 수석코치인 임중용 당시 허리가 아프다며 농땡이를 피우던 제난 라돈치치에게 같이 골대를 옮기자며 '야! 라돈! 투게더! 똑같이 해 이 XX야'(...)라고 하던 장면.[5] 유티는 인천 구단 창단 당시부터 존재했던 마스코트로 202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리뉴얼 됐다. 버미, 애이니, 꼬미, 등대리는 인천광역시의 시정 홍보 마스코트인데 등대리는 설정상 팔미도 등대의 손자라는 캐릭터고 버미, 애이니, 꼬미는 백령도에서 온 점박이물범 캐릭터다.[6] 쉽게 말해 구단 상징색과 홈 유니폼 디자인 기반으로만 치면 ''''한국판 인터 밀란''''. 팀의 유니폼은 물론 홈 경기장 좌석의 의자 배색도 파란색과 검은색이다.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를 소개하는 별칭에도 '파검(파랑+검정)의 OOO'라는 명칭을 쓸 정도로 팀의 상징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2012년에 허정무 감독이 그걸 왜곡하는 발언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7] 정규 리그 성적만 놓고 보면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뤘다. 하지만 당시 리그 규정에 따라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울산 현대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8] 부천은 경기도임에도 지역번호를 031이 아닌 인천과 같은 032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착안한 이름.[9] 당시 프로축구팀이 없었던 도시는 인천, 대구, 광주였다. 이 중 대구는 가장 먼저 시민구단 대구 FC를 창단했으며, 광주는 차선책으로 상무 불사조를 유치했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시민구단인 광주 FC로 다시 참가했다.[10] 인천이 여름 이적 시장에서 데려오는 국내 선수들은 대부분 상위권~중상위권 팀에서 선발이나 로테이션 멤버로 경쟁을 하다가 자리에서 밀려난 준척급 자원들로, 본인들이 원래 갖추고 있던 실력과 더불어 인천이 처한 상황 또한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목표 의식과 간절함이 매우 뚜렷하다.[11] 인천의 19시즌 마지막 홈 세경기에서 전북, 수원, 상주를 맞아 각각 12,684명, 11,132명, 11,463명이 입장했고, 이 홈 3연전에서 '''1승 2무'''를 거두면서 순식간에 승점 5점을 얻어내고 강등권 탈출에 성공했다.[12]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인천 팬의 목소리 크기만큼은 K리그 최고를 다툰다. 그 목소리로 만명이 악을 질러대니 선수들에게 분명히 자극이 됐을 것이다.[13] 만년 강등 위기가 '''조금''' 슬픈 이유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구단들은...[14] 여담으로 같은 동네 야구팀에게도 비슷한 별명이 있다. 정확히는 이 쪽이 원조.[15] 2013 시즌에 상위 스플릿 진출은 성공했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은 실패.[16] 시도민 구단 최초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은 2014년 성남 FC가 달성했다.[17] 이스탄불 더비에서 종종 언급되는 페네르바흐체의 6-0 대승리 당시 감독이기도 하였다. [18] 2007시즌에는 장외룡 감독이 유학을 다녀오면서 한시즌 통째로 박이천 감독대행이 이끌었다.[19] 최초 인천 출신 감독, 유일하게 시즌 중 사임하지 않은 감독.[20] 이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인천 단장이었던 안종복과 연관이 있다. 안종복이 인천 구단을 떠난 뒤 2013년 경남 FC 사장으로 간 후 2006년 캐치프레이즈와 똑같은 컨셉의 '도민속으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경남 FC 캐치프레이즈로 썼으나 팀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자신은 콩밥까지 먹게 됐다.(...)[21] 당시 인천 감독이었던 허정무가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언급했던 '유쾌한 도전' 이라는 말에서 차용됐다.[22]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입주 첫 해를 기념하는 의미.[23] '인천이 세상 축구의 중심이다'라는 의미.[24] '투게더'는 2006년에 개봉한 인천유나이티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s-3|비상’에 등장하는 현 인천 U-18팀 임중용 감독의 명대사로 유명하다. [25] 인천 유나이티드 12번 영구결번[26] 물론 여전히 인천문학경기장도 명목상 홈 경기장 중 하나다. 팀의 흥행이 절정에 다다라서 4만명 이상의 대관중이 들어올 수 있는 경기가 열린다면 인천문학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지만 과거와 달리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 제도는 오늘날 폐지됐기에 메가톤급 흥행 이슈가 몇 겹으로 터지지 않는 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인천 유나이티드 홈경기가 다시 치러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여담으로 인천문학경기장을 현재 관리하고 있는 주체는 한때 옆집 팀이었던 SK 와이번스.[27] 다만 이것은 서울과 수원이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분위기로 보나 뭘로 보나 슈퍼매치가 더 격렬하고 관심을 많이 받는 더비매치이다. 게다가 경인더비도 처음에는 서포터들에게 언론이 만들어준 더비라는 소리를 들었기도 햤다. 인천의 관중동원력이 수원보다 훨씬 약한데도 지금의 위상을 갖춘데는 사실상 언론의 지원사격 덕이 크기도 했다.[28] 1호선으로 수원과 인천을 오가려면 최소 1번은 환승해야 하지만, 수인선으로는 환승 없이 가능하다.[29] 부천은 경기도임에도 지역번호를 031이 아닌 인천과 같은 032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착안한 이름.[30] 제주 유나이티드 문서에도 나오지만 K리그가 명목상으로만 연고지를 설정하던 시절 유공의 연고는 서울·인천·경기였고 홈 앤드 어웨이 제도가 본격 도입된 1987년부터는 인천·경기지역을 연고지로 삼았다. 실제로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숭의동 공설운동장에서 유공의 홈경기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31] 인천 시절 2군 MVP를 하긴 했지만 인천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트레이드로 영입한 대구 FC에서 잘 키웠다고 보는 게 맞겠다.[32] 다만,이 시기는 인천만의 문제가 아닌 경남의 승부조작 건으로 인해 K리그 자체가 인기가 하락하던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인천은 관중 감소의 정도가 많은 수준이었긴 하다.[33] 2군 감독 겸임[34] 급여 지급에 관한 문제가 소송까지 진행되었고, 이윤표 측이 패소했다.[35] 국대 출신 내지는 이후 국대급으로 성장한 선수는 좀 있지만, 인천에서 국대에 뽑힌 선수는 유병수, 김남일, 김치우, 정인환, 전재호, 문선민 여섯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전재호는 부상으로 데뷔조차 하지 못했다. 최태욱조차도 인천 시절에는 청소년 대표로만 불려다녔다.